70년 전 일제 강점기 시대다.
경북 신동의 어느 보통 양민의 집 안 일이다.
그 집안에 넷째아들이며 노총각인 보부상이 한사람이 있었다.
대구 대신동 큰장에서 건어물을 띠어다가 대구 서쪽 켠 원고개를 넘어
칠곡군 지천신리에서 신동재를 넘어
신동 본집에 잠시 들렀다가, 상주 문경 점촌 쪽으로 장사를 떠나는 사람이었다.
상주에서 더 북쭉 내륙 쪽으로 문경가는 길 도중에
상주 함창 공갈못 이란 데가 있다.
어느 날 점촌5일장에서 등짐을 다 내려놓고 .....신동집으로 내려오던 길이었다.
근처 산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공갈못 근처 큰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그 집 에서 돌아진 듯한 뒷채에서 여인이 보였다.
소복 입은 젊은 여인이 마루에서 하염없이 허공을 보고 있었서.
그니의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봤어 면 하고 내려가 담벼락에 붙어 그 모습을 훔쳐봤다.
쪽찐 머리에 소복의 여인은 참으로 아름답드라 했다.
신동집에 누워서도 그니의 자태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으네.
다음 장사길에도 꼭 봐야 되겠다고 .....
또 할 수만 있으면 봇쌈질이라도 해야겠다.
그 시절은 과수댁 봇쌈은 나라에서 허락 된 터다.
늘 하든대로 다음 점촌5일장에 맞춰서...
대구 대신동 큰 장서 물건을 해다가, 상주 거쳐 공갈못을 거쳐 문경거쳐 점촌장에 갔다.
갔다 오면서 그 집을 염탐했다.
그니의 몸종인 듯한 쳐녀아이만 하나 왔다 갔다하고 집안에 사람이 안보였단다.
그니 는 그 집 뒤채에 거주 중이였다.
밤이 되기만 기다렸다.
밤이 깊어져 답장을 넘어가서 바로 그니 방문에 다가 갔다.............단독범행
방문을 확 걷어찼다. 촌집 방문 뭐 힘있나~
깜짝 놀라 일어나 앉는 그녀을 봇쌈해도 되는냐 는 식으로 자루를 보이니
놀랍게도 그녀가 고개를 끄떡였다. (지도 어데서 봇쌈소리는 들었던지.....)
그니를 업고 상주 거쳐 왜관 거쳐 높은 신동재를 넘어도 하나도 안 무겁더란다.
근120리길을..... 얼마나 좋았으면....
신동 본가에 데려다 놨다.
본가는 시조부님이 계시고..시부모님 계시고...시부모님 슬하에 남자10형제가 있고....
그 중 그니는 넷째아들의 부인이 된 것이다.
농사짓는 대농 집안 이어서 전체가 한집에 살던 때다.
손위동서도 계시고 손아랫동서도 있고
그날로 그니는 시집에 왔다고 자기 딴엔 시집 풍속에 맞춘다꼬
소복은 벗고 ...그 당시 양민 여인들이 입는 무명 치마저고리 걸치고
층층시하 세비사간 다 올리고
부엌에 밥한다고 들어왔는 데...
부엌은 생전 처음 들어온 사람이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네...
몸종이 해다 받치는 밥만 먹었던 모양인지...
그니는 붓글씨만 쓰고 수만 놓던 사람이었다.
그 시대는 시골에서는 집안 어른들이 여자가 글 배우면 못쓴다.
학교는 홰양년 만드는 곳이다.
통시글(한글) 배워서 어데다 쓰노...한글 정도는 학교 안가고 어른들한테 대충 배워도 된다.
등등으로 여자가 학교감에 대해 시골에서는 부정적으로 표현하던 시대다.
월사금도 아깝고......
또 여자는 남의 집에 보낼 사람이므로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해있었다....
촌사람 이니까...
그렇게 양갓집 규수면 학교에 보내 신여성을 만들던지......
이여자분도 문화의 과도기의 소용돌이에 놓여진 시대분이라 그런 혜택은 못 받았나 보다.
그 니가 그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8살 된 시댁 조카딸에게 하늘 천을 가르쳐 주는 것 외에는 .......
그 때 그 조카딸의 기억에 따르면
그녀는 키가 크고 등치도 좀 있고 잘났고 순하게 생기고 참 점잖아보였고
말말씨도 조용조용~ 채신 있게 진중하고...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품위 있고
비록 입은 옷은 무명천이나 본 배 있는 대갓집에서 행신을 잘 배워 나온 분 같았다 한다.
하여 어린 눈에도 참으로 귀한 여인으로 보였다 한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악빠리같이 살아 나아가는 이집에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은 분이라는 것도..
넷쌔 아들이 이분을 모시고 올 때..
그 몸종처자도 같이 들쳐 업고 왔어야 했었는데.............유감천만시럽게도
목적에만 치중한 나머지 전후 상황을 깨닫지 못한지라....
아무리 행신을 잘해도.....부엌에만 들어오면 동서들한테 걸거치는 분이라.......
그 집에 그니가 온 지 며칠 안된터다.
대식구의 찌개 정도 끓이는 돌솥을 부엌일이 서투른 그니가 깨트렸다.
양은냄비 없는 시절.,그 옛날에는 그 돌솥이 귀한 살림이던 가보다.
동서들이 깜짝 놀라 물러서니..
넷째 서방님이 얼른 그니 더러
“ 다치지 않았냐”며
“그까짓 솥은 사면 그만” 이라고 다음 장날 사오꾸마고 말했다.
한번은 같이 사는 형제분께, 부모님께, 그니 동서께 잘 못했다고 했다.
몇 일 안지나 또 돌솥를 깼다.
대번에 넷째 아들 손이 ...그니를 후려쳤다.
이 일을 기화로 그니는 매 맞는 여인이 된 것이다.
어느 한 날 안 맞는 날이 없었다.
자신이 이집에는 별 소용없는 사람이라고...친정집에 다시 대려다 달라고 그니는 울면서 애원 했다. 어림택도 없었다.
그 여인은 몸종 앞세우지 않으면 자기 집도 못 찾아갈 정도로 들어앉아 고이 커서,
이곳이 얼매나 자기 집에서 먼 곳인지 가늠도 못하는 냥.....
자꾸 맞고 하니 자존감도 상실한지.......
신동본집에서는 조부모님들 이하 모든 분들이 안사람한테 너무 그러면 안 된다고
넷째 아들을 그키나 말겨도
“지가 데려온 지 기집이라고 때리도 지가 때리고, 죽여도 지가 죽인다”고......
옛날 무식한 놈의 사랑은 이런가보다.
본디 넷째아들이 남에게 함부로 손대는 그렇케 나쁜 사람은 아니라 했다.
근데 어떻케 심판인지 그니한테만은 그렇게 손찌검을 하더란다.
그니가 어쩌다 한마디 만해도.... 사람이라면 행해야 할 도리를 말했겠지....
한마디 한마디가 고까왔는 지...
“오이냐~ 니 잘났다!. 잘난 년은 맞어도 안 아프제~”
기질이 순하고 어진여인이
인성을 파멸시키는 옳치 못한 상황에 놓여진데도..
상대가 억센 남정네라,... 기질이 드센 여인도 아니고 힘이 달려 같이 대항 못하고 그냥 맞으니 ...
넷째 아들 눈에는 지계집이라 그래도 되는 .... 그냥 만만 재이가 됐는 모양이다.
얼마 안되어 그니가 병석에 누웠다.
마음이 아픈지 몸이 아픈지...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몸이 쇠약할 때로 쇠약해졌단다.
마지막 소원이라고 친정집에 딱 한번 만이라도 가보고 싶다 했다.
처음에는 어림 택도 없었지만 , 오랜 기간 사람이 아파 누우니 측은은 하던 갑다.
친정에 자기 행시 일러 바치까바 물으니
절대로 말 안한다 .
부모님 가슴 아픈 소리를 내가 왜 하는냐.
안 그래도 시집 간지 얼마 안 되어 청상이 돼 부모님 전에 불효했는데....
다시 간 시집에서도 못산다면 부모님께 얼마나 죄송한 일이냐
잘나나 못나나 지서방인 데 서방 흉을 보면 쓰나! 지 낯에 침 뱉기지...
이러구로 넷째 아들을 달래어 친정 길을 갈 수 있게 됐다.
봇쌈 올 때
업혀오든 꿈 길 같던 길을.......이젠 아픈 몸을 겨우 일으켜 가보게 되었다.
120리길을 하염없이 걷다가
함창 공갈 못뚝에 왔을 때다
고을 높으신 분이 지나가시는지
멀리서 물렀거라...원님 행차시다.
뒤에서 원님이신 듯한 말 탄 이가 있고
앞장서서 사령 인 듯 한 이들이 길을 비켜라고 난리치니 ,
그 주위에 모든 이들이 굻어 엎드려 행차 지나기만 기다리네
넷째아들도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근데 지 아낙이라꼬만 여겨
만만히 업수이 여기든 그 여자~
그냥 서서 고개를 빳빳히 드네....
“이게 미쳤나~.. 빨리 고개 안 수구리고 뭐 하노?”
여자를 잡아당기는 순간.
그 여자의 입에서 말탄 이를 보고..
아픈 몸이 먼 길을 걸어 온 터라....힘 없이
“오빠” 이런다.
말탄 이가 행차를 멈추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며,
그니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이내 아연질색 .... 소스라치게 놀라며
“ 니 숙이 아이가? 근데 니 꼴이..?”
말에서 내려....그니의 초라한 입성과 병든 얼굴색과 몸을 살피더니..
사령에게 일러
“속히 가마를 대령하라”했다.
넷째아들이 내 계집입네 하고 나썼지만....
싹 밀쳐버렸다.
가마에 실고 떠나버렸다.
나중에 알아본바 자기 집에 데려와 그렇게 학대하던 그니가
상주 함창 인근 고을 원님의 유일한 여동생이고 그 집안의 귀한 고명딸 되시겠다.
그니의 처음 시집은 어느 판서 집에 시집을 갔어나
남편이 애기도 못 만들고 죽어서....청상과부가 되었든 터다.
그니 시대서 약100년 전 같으면., 시집에서 자결을 하여
홍살문내지 열녀문을 나라에서 하사받아 온 집안을 빛내는 문중의 자랑이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요때는 홍살문 시세가 없는 터라.~
그니 친정집에서는 출가외인이었어도
시집에서도 애기가 없는 상황에서 과부되어서 시집에 있기도 뭐하던 차에
친정집에 잠시 기거코자 뒤채에 있었든 것이다.
그니가 보쌈당해 없어진 걸 알고
친정에서도 들어 내놓고 혼인을 못하던 차에 ,오히려 잘 된 일 일수도 있다고 위로하며..... 어디서 잘살려니 했는데......
잘 살기녕 커녕
살아가는 가치 수준이 너무 차이 나는..... 평민의 집에 들어가 무지한 낭군에게
오만 인간학대 다 받은 걸 알고서는
넷째아들이 며칠을 그니 집 소슬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기도 했지만
그 댁 令愛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사람 취급도 안 해주고 문전박대 당했다.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하니
그 집 머슴들이 우 나와
다시는 이집 문 앞에 얼쩡이지 말라고, 죽을 만큼 흠씬 두들겨 패서
동구 밖에 끄어다 논 것을,
같은 보부상이 연통을 해줘서,
본집의 부모님들이 찾아 나서서 신동본집에 데려다 놨다.
그 길로 골병이 들었는지...문 밖 출입도 겨우 하고
밥도 제대로 잘못 먹고 술만 푸고.. ..몇 해를 사람행시 못하더니
맨 처음 그니를 업고 신동재 넘어올 때만 떠올리면서
한번만 봤어 면, 한번만 봤어 면~ 하면서.......그니 이름만 부르다가..
40도 채 못 넘기고 요절하셨다.
** 어째 잘못 들어온 행운 한 가지 더**
한국의 보통 사립 대학교을 졸업하고 인문학 계열 대학원에 들어간,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석사 과정 대학원생이 ..
어느 그저 그런 미국대학에다 입학허가서를 달라고 편질을 썼다.
생각잖케 그 곳 대학에서 장학금을 한 학기 줄 테니 유학 오라했다.
미국 유학 간다고 평상시도 좋아한 영어를 더욱 열심히 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한학기가 끝나자....자격이 안 되는지 장학금이 없었다.
요행이 얻은 걸린 유학 길 이었지만......나름 완성 시키려고
그 대학에서 외국인이라 할 수 있는 일은 다 구해 일했다.
영어공부와 동시에 전공을 하면서 돈을 벌수 있는,
그렇듯 희망하던 조교 자리도유학간지 4년 만에 구했다.
영어가 어느 정도 되어도 강의 할 수준은 안 되었다.
강단에 서면 미국학생들이
“저 조교 선생의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이러면서 다 자리를 떴다.
한10년을 미국에서 버티다 버티다.....종래는 정신 질환이 왔단다.
자기의 생명 줄인 강의실을 자신에게 모욕을 주며 박차고 나가는
미국인학생에 대해 증오의 마음을 담은 채로.
한국에 들어와 그 길로 정신 병동에 아주 긴 시간 입원했다고 들었다.
내 쪽에서 준비 되지 않은 행운은..... 받는 게 아니야~